유영국(1916~2002)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20세기 중반부터 회화 언어의 근본을 탐구하며
색과 선의 조형성을 통해 한국적 자연, 전통, 그리고 정신성을
새롭게 시각화하려 노력해 왔다.
서구 추상미술의 조류를 받아들였지만,
그 안에서 한국적인 조형 미감을 결합해
독자적 화풍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서구와 한국 현대미술의 가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유영국의 대표작들은
단순히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추상회화를 넘어
한국적 공간감, 여백의 미,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사유하고 표현한 예술적 기록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유영국의 대표작들을 중심으로
그의 회화가 가진 조형적 특징과
한국 현대미술사적 의미를 살펴본다.
유영국,《작품 1964》(1964) – 선과 색의 절묘한 교차
유영국의《작품 1964》는
그의 초기 대표작이자 한국 추상회화의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다.
이 그림은 두터운 붓질로 겹겹이 쌓인 색면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굵은 검은 선들이 화면을 분절하며
역동적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과 면의 관계다.
면은 대체로 따뜻한 회색과 적갈색, 청색 등
한국 산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감으로 채워져 있다.
그 위에 긴장감 있는 검은 선이 가로질러
마치 산맥 능선을 연상시키며
그림에 구조적 뼈대를 형성한다.
유영국은 이 시기 한국적 풍경을 추상적 형태로 전환하는 실험을 이어갔다.
그는 실제 풍경을 재현하지 않지만,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공간적 감각을 느끼게 했다.
《작품 1964》는
그의 회화 세계가 ‘자연-추상-정신성’을 하나로 연결하려 한
첫 성취라 평가된다.
유영국,《작품 1968》 – 색채와 구조가 교차하는 추상의 장
유영국의 《작품 1968》은 그의 중기 추상회화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작 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 그는 검정, 회색, 짙은 붉은색 등 대조적인 색면들을
화면 위에 수평·수직으로 배열해 묘한 긴장감을 만든다.
특히 색면이 서로 교차하는 경계에서는 얇은 선들이 등장해
구조적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이 선들은 단순한 구획선을 넘어 마치 산맥의 능선 혹은
강줄기의 경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영국은 이 시기 색과 구조의 관계를 깊이 탐구하며,
자연 속 질서와 에너지를 회화적 언어로 번역하려 했다.
《 작품 1968》은 단순히 형식적 실험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공존에 대한 시적 사유를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유영국,《작품 1972》(1972) – 여백의 미와 색면의 깊이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유영국의 그림에서는 한층 더 간결하고 묵직한
여백의 미가 강조된다.
《작품 1972》는 그 대표 사례다.
이 작품은 넓은 색면이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사이사이에 가는 선이 마치
바람결 혹은 물결처럼 스며든다.
색채는 이전보다 한층 절제되었다.
흙빛 갈색, 먹빛 회색, 그리고
여백처럼 남겨진 흰색 면들이
조화롭게 공존한다.
이 화면 속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생명력과 호흡이 스며드는 공간이다.
유영국은 이 시기 인터뷰에서
“그림 속 여백은 산과 들 사이를 흐르는 바람,
혹은 사라져 가는 빛의 흔적 같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그는 추상의 언어 속에서
한국적 자연의 정신성을 구현하려 했던 것이다.
《작품 1972》는
그의 회화가 본격적으로 ‘한국적 추상화’라는 개념으로
평가받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유영국,《산맥》(1980년대) – 추상 속 한국적 풍경의 재해석
1980년대 유영국의 작품은
한층 더 ‘자연과의 교감’에 초점이 맞춰진다.
특히 《산맥》 시리즈에서는
그가 평생 집착했던 ‘산의 이미지’가
구체적인 형태와 완전히 결별하고
추상적 리듬과 덩어리로 변모한다.
《산맥》 작품 속 화면은
수평과 수직으로 교차하는 선들,
부드럽게 겹쳐진 색층,
그리고 먹빛의 물결 같은 질감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그림 전체에서는
마치 산맥 능선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장엄하고 깊은 울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평론가들은 《산맥》 시리즈를
“자연의 이미지가 사라진 듯 보이지만,
동시에 자연의 본질적 기운을 가장 잘 포착한 그림”이라 평가했다.
유영국은 풍경을 해체하고,
그 대신 자연의 생명력과 시간성을
색과 선의 움직임으로 대체했다.
유영국,《무제》(1990년대) – 선과 색, 그리고 ‘시간의 흔적’
1990년대 유영국은
《무제》라는 제목으로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제목마저 비워두며
관객이 스스로 그림 속 리듬과 공간을 느끼길 원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큰 색면과
그 위를 부드럽게 흐르는 선들의 조합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선들은
완벽한 기하학이 아니라
인간의 손길과 흔적이 묻어 있는 불완전한 선이다.
유영국은 이를 통해
회화라는 행위 속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호흡을 담아냈다.
특히 붓질의 방향, 물감이 스며드는 흔적까지
그대로 드러나는 화면은
“색과 선의 결정체이자, 작가가 살아 숨 쉬는 존재의 기록”으로 읽힌다.
유영국에게 있어 예술은 완결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끊임없이 ‘나’를 갱신해 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
자연과 인간, 추상의 언어로 이어 붙이다
유영국의 대표작들을 살펴보면
그는 서구적 추상미술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한국적 자연관과 동양적 미학을
색과 선의 실험으로 자기화해낸 작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에는 격렬한 붓질과 부드러운 여백,
동시다발적 선의 흐름 속에 깃든 호흡의 리듬이 공존한다.
그는 끝까지 “추상은 나를 비우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며,
예술을 삶의 일부, 그리고 인간 존재의 탐구와 연결했다.
유영국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한국 현대 추상미술이 세계 속에서 가지는
독자적 위치와 가능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다.
그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형태를 잃은 뒤에도 남는 것은 무엇인가?
비어 있는 것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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