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전시

화가 정현웅의 대표 작품과 해설 : 민중의 삶을 화폭에 담은 기록자

narikkot5020 2025. 7. 1. 01:08

정현웅(1912~1976)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화가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회화’라는 틀 안에서 머무르지 않고,
한국 사회가 겪었던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과 같은
극심한 혼돈의 시기를 온몸으로 살아낸 민중들의 삶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시대적 기록이었다.
특히 그는 서정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역사 속에서 소외되고 억압받은 사람들의 얼굴과 풍경을
따뜻하고 깊은 시선으로 그려냈다.

정현웅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 희망, 절망, 소소한 일상의 평온까지
모두 녹아 있다.
그림 안에서 인물들은 정면을 응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시선을 피하며 각자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이번 글에서는 정현웅의 대표작 몇 점을 중심으로
그의 예술이 한국 근현대미술에 던진 의미와,
그림 속에 담긴 따뜻한 인간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화가 정현웅의 작품 <부산풍경>

《 항구》(1954) – 전쟁 후 폐허의 풍경과 삶의 지속

정현웅의 대표작 중 하나인 《항구》(1954)는
6.25 전쟁 직후 부산항 부두 근처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전쟁으로 피란 온 사람들, 폐허가 된 건물과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회색과 갈색 톤이 주를 이루는데,
이는 전쟁이 남긴 황폐함과 피난민들의 고단한 삶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림 속 인물들은 절망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묘한 생명력을 품고 있다.
어깨에 보따리를 메고 부두를 오가는 사람들,
바닥에 주저앉아 작은 장사를 하는 여성,
그리고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노인의 표정 등
각 인물은 작고 사소해 보이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전쟁의 비극을 견디고 살아가는 민중의 서사를 증언한다.

정현웅은 이 그림을 통해
역사와 현실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는 그들을 동정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적나라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한 장면을 기록한다.

 

《부두》(1957) – 근대화 속 흔들리는 인간의 자리

《부두》(1957)는 정현웅이 전후 한국 사회의
급속한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 속에서
민중의 소외감을 담아낸 대표작이다.
이 작품에서도 부산항의 부두 풍경이 주 배경이 되는데,
앞서 《항구》에서 보여줬던 고단한 삶의 연속선상에서
좀 더 냉철한 현실 인식이 드러난다.

이 그림은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크레인과
수많은 컨테이너, 쌓여있는 화물 등
근대적 산업 설비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람들의 형상이 작고 흐릿하게 묘사되면서,
거대한 기계 문명 속에서 점차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대비된다.

정현웅은 이를 통해 한국 근대화의 그늘을 묘사하고 있다.
물질적 풍요가 약속되었지만,
그 안에서 개인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서로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익명의 군중으로 전락해간다.
그의 그림은 산업화의 불가피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잊혀가는 사람들을 집요하게 붙잡는다.

 

《부산 풍경》(1962) – 변화하는 도시와 서민들의 일상

1960년대 초반으로 넘어오면서,
정현웅의 시선은 점차 도시의 풍경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으로 향한다.
대표작 《부산 풍경》(1962)은
급속히 성장하는 부산 도심 한복판,
좁은 골목길을 오가는 인물들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이 작품에서는 이전의 암울하고 묵직한 색조 대신
다소 밝은 톤의 색이 사용되었다.
건물 벽면은 회백색이지만,
그 사이사이로 노란 불빛이 번쩍이며
도시의 활력이 은근히 느껴진다.
그림 속 인물들은 장을 보러 가는 어머니와 아이,
허름한 행상인, 그리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노인의 모습 등
각자의 작은 삶을 이어간다.

정현웅은 이 작품에서
도시가 변모해 가는 과정을 서정적인 시선으로 기록한다.
그는 여전히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 속에서
소박한 연대감, 그리고 “살아있음 자체의 의미”를 찾아낸다.

 

《노점상》(1968) – 고단한 삶 속 끈질긴 생명력

1960년대 후반, 한국 사회는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정책으로
경제 성장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가난과 빈부 격차,
도시 빈민 문제 등이 산적해 있었다.
정현웅의 《노점상》(1968)은
그러한 시대적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화면에는 허름한 노점을 지키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옆에는 달걀판 몇 개와 깡통,
그리고 소량의 채소 등이 놓여 있다.
화면 뒤쪽으로는 모여있는 행인들의 실루엣이
어슴푸레하게 처리되어,
이 여성이 혼자 세상과 맞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여성의 얼굴이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동시에 눈빛은 희미한 빛을 머금고 있다.
정현웅은 붓질과 색의 겹침으로
그 눈빛 속 삶에 대한 집착과 단단한 의지를 표현한다.
그는 시대의 폭력과 불평등 속에서도
‘살아내는 사람’들의 고개를 들어 올려 주었다.

 

민중과 함께 호흡한 화가의 기록

정현웅의 대표작들은 하나같이
소외된 사람들, 거친 현실, 그리고 산업화·근대화의
모순적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민중을 담고 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대체로 초라하고,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들이지만,
그들의 삶은 오히려 역사와 시대의 큰 흐름 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적 증언이 된다.

정현웅은 민중적 시선과 서정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따뜻한 온기와 연대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사회 고발적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은 휴머니즘의 기록이다.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공간 속,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정현웅의 회화는 그 질문 앞에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삶을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