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전시

화가 피카소의 화풍 변천사

narikkot5020 2025. 6. 29. 08:04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 중 하나다.
20세기 초부터 사망할 때까지 9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는 놀라운 속도로 자신의 화풍을 변화시키며
끊임없는 실험과 파격을 감행했다.

그의 삶은 단 한 가지 양식에 머무른 적이 없었다.
유화, 소묘, 판화, 조각, 도예 등 장르를 넘나들었고,
고전주의와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까지
그의 회화는 시기마다 완전히 다른 언어를 구사했다.
피카소가 남긴 작품 수는 약 5만 점에 달하며,
이는 단순한 생산성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의 화풍 변천은 곧 20세기 예술사의 실험 그 자체였다.
이 글에서는 피카소의 대표적인 화풍 변화 과정을 따라가며
그가 어떤 질문을 던졌고, 어떤 방식으로 회화를 해체하고
다시 구성했는지를 정리해 본다.

화가 피카소의 화풍, 책을 읽는 두 소녀의 그림

화가 피카소의 청년기 – ‘청색시대’와 ‘장밋빛 시대’

피카소의 초기 화풍은 비교적 전통적이고 감성적이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이어지는 ‘청색시대’는
그가 절친한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의 자살 이후
심한 우울에 빠져 있던 시기다.
이 시기의 그림은 어두운 청색과 회색이 주를 이루고,
주제는 고독, 가난, 죽음, 장애 등 사회적 약자에 집중되어 있다.

대표작으로는 《인생》(1903), 《노인의 식사》(1903),
《푸른 누드》(1902) 등이 있다.
이 시기의 인물들은 마치 형벌을 받은 듯한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으며,
정적인 화면 안에서 내면의 고통을 강하게 전달한다.

그 후 1904~1906년 사이에는 ‘장밋빛 시대’로 전환된다.
이때는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와 함께 살며
삶이 조금은 안정되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그림은 따뜻한 분홍, 주황, 살색 계열이 주를 이루고,
서커스 단원이나 곡예사, 연인들이 주된 주제로 등장한다.
대표작은 《곡예사의 가족》(1905), 《하를레킨》(1906) 등이다.
피카소는 이 시기에 감정의 색채를 회화 언어로 전환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화가 피카소의 입체주의

1907년, 피카소는 서양미술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찍는다.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은
고전적 구도를 완전히 거부하고,
아프리카 원시 조각과 이베리아 반도의 고대 조각에서 영감을 받은
파격적인 인물 해체로 가득한 작품이다.

이 그림을 기점으로 그는 브라크(Georges Braque)와 함께
입체주의(Cubism)를 공동으로 개척한다.
입체주의는 하나의 사물을 다양한 시점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회화 방식으로,
고전적 원근법과 단일 시점을 부정한다.
즉, 보는 대상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새로운 시각 언어를 창안한 것이다.

입체주의는 초기의 분석적 입체주의(Analytic Cubism)와
후기의 종합적 입체주의(Synthetic Cubism)로 나뉘며,
전자는 형태를 철저히 분해하여 색채는 제한적으로 쓰는 경향이 있고,
후자는 콜라주 기법이나 강한 색채로 형태를 다시 조립한다.

대표작으로는 《기타와 병》(1913), 《만돌린을 든 여인》(1910),
《신문이 붙은 병》(1914)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시각적 진실보다는 구조적 진실에 주목했다.

 

화가 피카소의 신고전주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피카소는 다시 고전주의로 돌아선다.
1920년대 그의 그림은 놀랍도록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일부 작품은 마치 르네상스 시기의 조각이나 벽화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는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건장하고 이상화된 인물들을 그렸고,
특히 여성의 신체가 두드러진다.

대표작으로는 《파이프를 든 소년》(1923),
《목욕하는 여인》(1921), 《세 여인》(1921) 등이 있다.
이 시기는 ‘신고전주의 시대’ 혹은 ‘고전 회귀기’로 불린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단순히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피카소는 전통적 조형 언어를 자기 식으로 재해석했고,
거대한 인체나 부조식 표현에서 기이함과 장엄함을 동시에 만들었다.

이 시기는 흔히 ‘형식에 대한 재훈련’ 시기라고도 불린다.
그는 스스로가 해체한 조형 원리를 다시 복원하고,
그 힘의 방향을 점검하는 시간을 보냈다.

 

화가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와의 만남

1920년대 후반부터 피카소는 초현실주의(Surrealism) 화풍의 영향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다수의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달리
완전히 초현실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상상과 현실, 꿈과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폭력, 성, 욕망, 불안 등 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형상화했다.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 공군이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분노한 피카소는 3주 만에 대형 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한다.
흑백으로만 이루어진 이 작품은
말을 울부짖는 여성, 부서진 육체, 무표정한 눈 등을 통해
전쟁의 광기와 인간의 고통을 극적으로 압축해 낸다.

《게르니카》는 단지 그림이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와 미술의 실험이 결합된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전시 이후 국제적인 반전 상징이 되었고,
피카소 역시 사회적 예술가로서의 위치를 확립한다.

 

화가 피카소의  만년기 - 해체와 유희

피카소는 죽기 직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는 노년기에 다시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다.
형태는 더 간결해지고, 색은 더 자유로워졌으며,
기법은 빠르고 거침없이 펼쳐졌다.
일부 작품은 거의 아이가 그린 듯한 유희적 감각을 담고 있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삶과 예술의 경계를 지우는 작업을 이어간다.
그는 고전 작품을 패러디하거나,
고야, 벨라스케스, 마네 등 미술사 거장들의 명작을
자기 식으로 변형해 다시 그린다.
《라스 메니나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연작 등이 그것이다.

이런 태도는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다.
그는 역사와 맞서 싸우기보다,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 ‘놀이하듯 해체하는 방식’으로
예술을 갱신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만년의 작품들에서 피카소는 기교나 논리보다
직감과 감정, 충동에 가까운 태도를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이를 먹을수록
오히려 젊어진 화가처럼 보인다.

 

화가 피카소는 끊임없이 물었다

피카소의 화풍 변천은 단순히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다.
그건 그가 끊임없이 “회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매번 새롭게 찾아간 과정이었다.

그는 기술적으로 이미 완성된 화가였지만,
단 한 번도 안주하지 않았고,
형태를 깨고, 구조를 바꾸며, 색을 실험하고,
감정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예술을 확장시켰다.

피카소는 “나는 찾지 않는다, 나는 발견한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그가 얼마나 직관과 충동, 반복과 우연 속에서
스스로의 예술 언어를 새로 발견해 나갔는지를 보여준다.

피카소를 이해한다는 건
그의 어떤 시기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변화하려 했던 이유’와
그 변화의 방향성
을 함께 읽는 것이다.

그의 화풍 변천사는 곧 20세기 예술이 나아간 길이며,
앞으로도 예술이 끊임없이 실험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