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카옹(Claude Cahun, 1894–1954)은 오늘날 퀴어 미술과 젠더 연구, 그리고 페미니즘 예술의 선구자로 재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생애 대부분 동안, 카옹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로 살아야 했다. 본명은 루시 슈워브(Lucie Schwob). 1917년경부터 ‘클로드 카옹’이라는 중성적 필명을 사용하며 스스로의 성 정체성과 젠더 표현을 흐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성별 이분법에 도전했던 급진적 예술가였다.
카옹은 사진, 글쓰기, 연극, 설치미술,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자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수행되고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시각적으로 실천했다. 그녀의 작업은 20세기 초 초현실주의 운동과 겹치면서도, 보다 개인적이고 정치적이며,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젠더 이론과 기묘하게도 정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클로드 카옹의 생애를 따라가며, 그녀가 남긴 파격적 작품들이 어떻게 시대를 거슬러 살아남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루시에서 클로드로 – 자기부정에서 자아 해체로
카옹은 프랑스 낭트의 유대인 출신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저널리스트였고, 삼촌 마르셀 슈워브는 상징주의 작가로 알려진 문학계 인사였다. 어머니는 정신병을 앓으며 병원에 장기 입원했고, 이 어두운 가정환경은 카옹에게 자아에 대한 불신과 동시에 깊은 성찰을 불러왔다.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면서 카옹은 본격적으로 예술과 정치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1917년경, 클로드 카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신체적 성, 정체성, 존재론적 경계를 작품을 통해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실험을 전개한다. 이때부터 사진과 퍼포먼스를 결합한 실험적 자화상 작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여성 예술가’라는 정체성조차 거부했고, “나는 자아를 연기한다. 나는 항상 내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자아의 불안정성을 정면에서 응시한 그녀의 이 선언은, 훗날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퀴어 이론의 핵심 논점을 미리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콜로드 자화상의 재구성 – 사진 속 다중 자아의 시학
카옹의 대표작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자신을 모델로 한 사진 자화상 시리즈다. 이 사진들은 대부분 연인인 마르셀 무어(Marcel Moore, 본명 수잔 말레르브)가 촬영했으며, 카옹은 직접 분장과 연출, 무대 장치를 계획했다. 한 장면에서는 남성 정장 차림으로 나타나고, 다른 장면에서는 반쯤 벗은 몸에 페인트를 칠하고, 또 어떤 사진에서는 삭발한 채 정면을 응시하거나 기괴한 마스크를 쓰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는 1927년경 촬영된 《자화상(거울과 함께 한 이중 이미지)》이다. 이 사진에서 카옹은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카메라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여기에는 세 개의 시선이 존재한다. 거울 속의 자아, 렌즈를 향한 자아, 그리고 사진을 보는 우리의 시선. 이 구도는 자아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보는 방식과 위치에 따라 분열되고 해석된다는 시각적 이론을 제시한다.
그녀의 사진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다. 이는 하나의 비주얼 철학이며, 젠더와 자아의 연극이다. 그녀는 사진 속에서 ‘여성다움’이라는 사회적 각본을 연기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해체하고 조롱한다. 이러한 시도는 훗날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자화상 작업이나, 젠더 수행성 이론의 핵심 개념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논지와 매우 닮아 있다.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거리 – 정치적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클로드 카옹은 1920년대 초현실주의자들과도 교류했다. 특히 앙드레 브르통과 접촉하며 여러 전시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녀는 초현실주의가 여성의 신체를 미화하거나 ‘뮤즈화’하는 경향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녀는 “나는 뮤즈가 아니라 창조자이며, 나의 무대는 나 자신의 몸”이라고 주장했다. 여성의 몸을 타자화하지 않고, 예술의 도구이자 대상이자 주체로 삼았던 그녀의 작업은 동시대 초현실주의 여성 작가들과도 결이 달랐다.
1937년 카옹은 연인 마르셀 무어와 함께 저지섬(Jersey Island)으로 이주하며 나치즘에 맞서는 저항 운동에 뛰어든다. 독일 점령기 동안 그들은 독일군을 상대로 선전문을 제작하고, 신문을 변형한 위장 포스터를 만들어 배포하는 등 은밀한 활동을 전개했다. 결국 이들은 체포되어 사형 위기에 처했다가 종전 직전 풀려난다.
이러한 활동은 클로드 카옹이 단순히 ‘예술가’가 아닌 정치적 실천자였음을 보여준다. 그녀의 작품은 개인적 실존의 기록이자, 동시에 시대 권력과 맞서는 예술적 저항의 흔적이기도 하다.
20세기 말 클로드의 재조명 – 망각과 재발견
클로드 카옹은 1954년, 저지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작품은 생전 전시도 거의 없었고, 사후 수십 년간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페미니즘 미술사와 젠더 이론, 퀴어 담론이 확산되면서 그녀의 작업은 현대 미술의 선구적인 실천으로 재발견된다. 1994년 런던 ICA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과, 2000년대 이후 퐁피두센터, 뉴욕 MoMA 등의 전시는 카옹의 예술이 21세기적 맥락에서도 강한 울림을 가진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카옹의 자화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언한다.
그녀는 젠더와 자아, 예술과 정치, 주체성과 수행성이라는
동시대 가장 핵심적인 주제들을
90년 전, 오직 카메라 앞에서 말없이 구현해냈다.
그 선명한 시선은 지금도 관객을 향해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클로드의 예술은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 시각 언어
클로드 카옹의 예술은 외적으로는 조용하고 은밀하지만,
내용적으로는 강력한 철학적 선언이다.
그녀는 여성의 몸을 사회가 규정한 방식으로 소비하지 않고,
그 몸 자체를 통해 정체성과 젠더의 불확실성을 실험했다.
그녀의 자화상은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무대, 퍼포먼스, 철학, 정치가 결합된
복합적 텍스트로 읽힌다.
그녀는 스스로를 꾸미고, 연출하고, 기록하며
당시 어떤 예술가도 도달하지 못한 자아의 다층성을 시각화했다.
그녀는 퀴어였고, 유대인이었고, 여성 예술가였으며,
그 모든 경계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실천가였다.
오늘날 클로드 카옹의 작품은
미술관의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의 모든 경계를 질문하는
우리의 눈 앞에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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