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제목은 왜 이럴까? 유명 화가 5인의 제목 철학
미술관에서 그림을 볼 때, 우리는 종종 그림 옆에 붙은 작은 팻말을 본다. 그 팻말엔 작가 이름, 제작 연도, 재료, 크기, 그리고 제목이 적혀 있다. 대부분의 관람객은 작가 이름보다도 먼저 제목을 본다. “이게 대체 뭘 말하려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목은 종종 관람자에게 혼란을 주기도 한다. 제목과 그림의 관계가 너무 직접적일 때도 있고, 너무 멀어 괴리감을 줄 때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기도 한다.
그림은 말을 하지 않지만, 제목은 일종의 언어다. 작가들은 왜 굳이 그림에 제목을 붙였을까? 어떤 화가는 작품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제목을 붙이고, 어떤 화가는 오히려 관람자의 해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제목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 글에서는 20세기와 21세기 미술사에서 중요한 5명의 작가를 통해, ‘제목’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작품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화가 르네 마그리트 – 제목은 그림을 설명하지 않는다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는 제목과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작품의 핵심 전략으로 삼았다. 그의 대표작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La Trahison des images, 1929)를 보면, 정교하게 그려진 파이프 이미지 아래에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처음엔 당혹스럽지만, 생각해 보면 그는 옳다. 그것은 진짜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그림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그림과 언어의 관계를 교란시킴으로써 관람자가 현실과 재현, 대상과 상징 사이의 거리를 자각하도록 만든다. 그에게 제목은 작품의 해석을 안내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생각을 멈추지 않게 만드는 질문의 장치였다. 그는 어떤 작품은 제목 없이 발표하기도 했으며, 종종 시인 친구에게 제목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림이 설명을 거부할수록, 제목은 오히려 의문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맡는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 – 제목이 감정보다 늦게 온다
입체주의를 창시하고 수많은 실험적 양식을 선보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제목 붙이기’에 있어서 자유로우면서도 전략적이었다. 그는 많은 작품에서 단순히 《기타와 병》, 《책 읽는 여인》, 《자화상》 등 묘사된 대상 그대로를 제목으로 붙였다. 그러나 《게르니카》(Guernica)나 《민중의 탄식》처럼 특정한 역사적 맥락이나 감정을 담은 작품에서는 제목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도구로 기능하기도 했다.
피카소는 제작 속도가 매우 빠른 화가였고,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듯한 즉흥성이 강했다. 그렇기에 많은 작품은 제작 후에 제목이 붙었다. 그는 “그림은 그리는 것이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제목은 뒤따르는 것이었고, 때로는 관람자나 평론가에 의해 후대에 붙여진 경우도 있다. 즉, 피카소에게 제목은 감정을 정리하는 나중의 절차였지, 그림의 해석을 선행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 – 삶을 품은 제목
영국의 현대미술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는 시각적 유희와 사적인 정서를 제목에 녹여낸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 1967)은 간단한 표현 같지만, 이중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수영장 속 인물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튀어 오른 물보라, 그리고 그 순간을 강조하는 제목은 오히려 무엇이 부재한지를 강조한다.
호크니의 제목은 종종 작품의 장소, 순간, 감정을 드러낸다. 《미스터와 미세스 클라크와 퍼시》처럼 인물의 정체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제목은 마치 초상화 속 이야기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처럼 작용한다. 그는 자신만의 ‘색감 있는 일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관람자에게 감상 포인트를 놓치지 않도록 은근하게 안내한다. 제목이 너무 모호하지도 않고, 너무 설명적이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호크니는 제목을 감각적으로 다루는 대표적 작가라 할 수 있다.
화가 프리다 칼로 – 제목은 고백의 문장이다
멕시코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그려낸 대표적인 ‘자화상의 작가’이다. 그녀의 그림은 시각적으로 강렬하지만, 더욱 강한 것은 제목이 담고 있는 내면의 진술이다. 예를 들어 《나는 내 인생에서 두 번의 큰 사고를 겪었다》(1932)라는 제목은, 그림 그 자체보다도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 하나는 버스 사고, 다른 하나는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 생활이다.
프리다 칼로는 제목을 감정의 언어, 혹은 문학적 서술의 시작으로 활용했다. 그녀의 자화상 시리즈는 단순한 얼굴의 표현이 아니라, 감정의 기록이자, 생존의 선언이다. 《부서진 척추》, 《나는 사랑받는 여인이 아니다》 같은 제목은 그림과 뗄 수 없는, 심리적 문장으로 작용한다. 그녀의 작품은 한 점 한 점이 미술과 문학, 고백과 정치가 교차하는 복합 장르이며, 그 출발점은 바로 이 직설적인 제목에서 시작된다.
화가 마크 로스코 – 무제, 혹은 침묵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마크 로스코(Mark Rothko)는 제목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화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들은 대개 《무제》(Untitled) 또는 《무제 – 빨강, 검정, 갈색》(Untitled – Red, Black, Brown)처럼 색면만을 언급하거나 아예 제목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작가의 철학이 반영된 선택이다.
로스코는 색과 구성의 추상적인 울림을 통해 영혼의 감정, 존재의 깊이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제목이 관람자의 해석을 가두는 것을 우려했고, 감상자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으로 그림과 대화하길 원했다. 그렇기에 그는 종종 제목조차도 주지 않았고, 작품 앞에서 침묵을 권유했다. 이처럼 ‘제목 없음’은 오히려 제목 그 자체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도 있다. 로스코의 침묵은 관람자의 감정을 주인공으로 만든다.
화가들은 제목을 통해 무엇을 남기는가
이 다섯 작가의 예를 통해 우리는 제목이 단지 그림을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해석의 방향을 결정짓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오히려 해석을 보류하게 만드는 장치일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는 제목을 통해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를 해체했고, 피카소는 감정의 흐름 속에 제목을 뒤늦게 붙였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일상과 순간의 감각을 제목에 담아냈으며, 프리다 칼로는 고백처럼 제목을 읊조렸다. 마크 로스코는 침묵을 통해 제목 자체를 거부했다.
제목은 작품을 설명하기도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모든 제목은 작품의 일부이며, 작가의 세계를 엿보는 창이라는 점이다.
이제는 그림의 제목도 감상 대상이다
그림의 제목은 더 이상 단순한 ‘설명’의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해석의 실마리이자, 감정의 안내자이며, 때로는 철학적 입구가 되기도 한다. 제목을 읽고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고 다시 제목을 읽는 왕복 감상이 가능할 때, 우리는 그 예술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그림뿐만 아니라 그 제목에도 천천히 시선을 머물러보자. 작가가 붙인 단어 하나하나에는 그림 속에 다 담지 못한 내면의 이야기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